와닿는 내용을 적어보면서 읽었다.
잘 읽히지 않아서 오래 읽었다. 무려 2달이나.
그래도 중간 중간 울리는 에피스드들이 많이 있었다.
복잡한 머리가 쉬고 새로운 시선으로 생각할 시간도 주고 남기고 싶은 에피소드도 많았던 책이다.
날짜는 읽은 날이고
개행 된 글은 문단이 다르다.
책의 서두에 바보들의 이야기라는 걸 강조한다.
얼마나 바보길래 바보, 바보하는지 궁금했다.
다 읽고 나니, 인간적인 바보들의 이야기 맞다.
2021년 9월 6일
따라서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기는 쉽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어려운 일인지 잊어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지는 못한단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주 좋은 인간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려움이 가중 된다고 말이다.
2021년 9월 8일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열대어에 대해서만큼이나 없기 때문에 엄청난 책임감으로 매일 아침 벌벌 떤다.
공과금도 내야 하고 어른도 되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는 법을 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지독히 높은 일이라서 겁에 질릴 때도 있다.
2021년 9월 9일
"아니, 질문에 대답을 해달라고요!" 경관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어린 시절 어느 시기에 삶에 환멸을 느낀 뒤 그 감정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성인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을 짓는다.
2021년 9월 10일
인생 선배가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네가 힘들어하고 있는거 안다. 그래서 나도 괴로워"뿐 일 때는 말이라는 것이 고역이 된다.
젊은 경관의 신발이 그가 앉았던 의자 아래 바닥에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남겼다.
고참 경관은 그걸 보며 수심에 잠긴다. 아들이 경찰이 되지 않길 바랐던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는 침착하게, 연민에 가까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모로서 제일 끔찍한 게 뭔지 아니? 최악의 순간을 기준으로 평가받는다는 거야.
백만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공원에서 아이가 그네에 머리를 맞았을 때 핸드폰을 들여다본 부모로 영원히 낙인이 찍히지.
며칠 동안 아이한테서 눈을 뗸 적이 없어도 문자 메시지 하나 확인한 순간 그동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없던 일이 돼.
어렸을 때 그네에 머리를 맞지 않았다고 해서 상담을 받는 사람은 없잔항.
부모는 항상 실수에 의해 규정이 되지."
2021년 10월 11일
직업 특성상 오랫동안 그 일을 하다 보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커리어를 제외한 인생의 다른 부분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6일
"내 말 듣고 기분 상했어요? 아우, 선생님 같은 사람들하고는 말을 섞는 그 순간부터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단 말이죠."
"이래저래 충돌하는 경우가 많으신 모양인데요. 발끈하기 전에 이 세 가지를 자문해보는 걸 추천할게요.
하나, 문제의 그 사람이 나를 해치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둘, 그 상황과 관련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은 없을까.
셋, 이렇게 부딪침으로써 얻는 소득이 있을까.
그녀가 모르는 모르는 단어는 없었지만 여러 단어를 모자 안에서 닥치는대로 꺼내 한데 조합한 것처럼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것 보세요,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어요. 어쩌다 보니 저절로 중역 회의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없다고요."
"비싼 음식점은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요. 비행기 1등석은 가운데 자리가 없고요. 특급 호텔에는 스위트룸 고객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 따로 있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곳에서는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이 남들과의 거리예요."
"내 경험상 세상에는 개 같은 인간들이 많아요. 감정적으로 냉랭하고 생각 없는 인간들. 하지만 그래도 그 인간들은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지 않죠."
"맞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세상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한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죠. 적어도 세상을 지금보다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지는 않다고, 자기가 옳은편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그러니까...뭐라고 하면 좋을까요...우리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더라도 그 행동이 좋은일에 쓰였다고 믿고 싶은 거죠. 기본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니 자신이 도덕적 잣대를 어겼을 때를 대비해 변명을 마련해야 하는거에요. 범죄학에서는 이걸 중화 기술이라고 부를 거예요.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념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믿음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아무튼 악행을 정당화할 방법이 필요하죠. 왜냐하면 저는 솔직히 자기가...나쁜 사람이라는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거든요"
핸드백에 담긴 편지는 여전히 미개봉 상태였고 사라는 심리 상담사의 말이 맞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감히 그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사라는 자신의 진면모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멍청해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속으로는 그렇다.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물론 문제가 있다면 바보들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바보라서 친절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나디아에게는 그것이 평생 씨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과업이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과 함께 지낸 세월이 너무 길다 보면 더는 옥신각신 하지 않는것과 신경쓰지 않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2021년 11월 8일 오후 3:41
바보들은 인질로 붙잡아놓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2021년 11월 12일 오전 1:12
인생에서 딱 하나만큼은, 딱 한명만큼은 당연하리만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들은 예전부터 대화가 없었다.
안나레나는 아이가 생기면 나아지길 바랐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기분 상태에 온 가족이 숨죽이는 날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리다 보면 어른들은 한참 동안 자기 기분을 아무한테도 토로하지 못한 채 지낼 수 있고,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어떨 때는 아예 토로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2021년 11월 12일 오전 9:15
"용서해주세요." 은행 강도가 그들 위로 내려 앉은 정적을 불쑥 깨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못 들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두 들었다. 얇은 벽과 그 빌어먹을 오픈 플랜식 배치 덕분에 그가 한 말이 벽장 안, 현관홀, 화장실 문 너머에까지 들렸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지 않았지만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두 알았다.
"죄송합니다." 은행 강도가 아까보다 더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작 됐다. 은행 강도가 아파트에서 탈출하게 된 사연이. 은행강도는 그 말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를 용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톡홀롬'은 중후군이 될 수도 있다.
"라임 드실래요?"
논리와 이성적인 사고를 관장하는 뇌의 일부분에서 천 개의 조그만 신경종말이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상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온 직후에 방영된 TV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로게르는 달걀에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안나레나가 깜빡 잠이 들면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거나 그녀의 머리를 어깨로 계속 받치고 있고 싶어서 가끔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버틸 때도 있었다.
율스는 계속 제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지만 저는 심지어... 달걀을 사도 되는지, 그것조차 결정을 못 내리는걸요. 저는 못 할 거에요.
그는 로가 뭣 떄문에 겁이 나는지 알고도 남았다.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 거기서 문제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해야 하는 것. 요즘 들어서 로게르는 이걸 시인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미치도록 화가 나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령 세상에 기여하는 능력이나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능력 같은 것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 그는 이제 안나레나에게 간파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화장실에 토끼를 숨겨놓고 존경하는 척 연기하는 쇼로 전락했고 아파트 하나를 더하고 뺀들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로게르는 심이 부러질때까지 이케아 연필로 손톱을 찌르다 짧게 헛기침을 하고 로에게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가장 근사한 선물을 했다.
"아내를 위해서 이 집을 사요.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조금 손 볼 데가 있을지는 몰라도 습기가 차서 얼룩진 곳도 없고 곰팡이도 없어요. 부엌과 화장실은 상태가 아주 훌륭하고 주택조합 재정도 탄탄해요. 걸레받이가 몇 군데 헐거워지긴 했지만 금세 고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저는 걸레받이를 고칠 줄 몰라요." 로가 속삭였다.
로게르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고 아주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네 마디를 뱉었다.
"잘할 수 있을 거에요."
2021년 11월 13일
세심하고 원칙적이다. 흔히들 하는 말이죠.
“세심하고 원칙적이다. 흔히들 하는 말이죠.”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쟁을 시작한 모든 노인네를 묘사하기에 딱 알맞은 단어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그럴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당신한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좀 더 수월할 줄 알았어요…… 여자랑 같이 살면.”
율리아는 폭소를 터뜨렸다.
“어떤 성별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안나레나. 어떤 바보를 사랑하게 되는 거지.”
안나레나도 평소보다 훨씬 크게 폭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에 그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안나레나는 나이가 율리아보다 두 배는 많았지만 그 순간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손자가 생기면 그분이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나요?”
안나레나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세 살짜리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서 집까지 가본 적 있어요?”
“아뇨.”
“그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될 수 없어요.”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외풍에 살짝 떨며 그 자리에 앉아 있는다. 두 사람 모두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2021년 11월 15일 오후 4:50
로게르는 쪽지를 매달 만한 묵직한 물건이 없는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밀도가 딱 알맞아 보이는 둥그런 물건을 발견했다. 발코니에서 누군가가 다시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야크가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라임에 이마를 맞게 된 사연은 이랬다.
그 정도 거리에서 라임에 맞으면 왕따시만 한 혹이 생긴다.
"우린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친구가 아파트를 구경 갈떄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는거 아세요? 그게 용납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사실 개의치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냉장고를 열어주길 바라요. 그게 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시도하는 이른바 '홈스타일'의 일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한번은 냉장고 안에 타코가 있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먹은 타코 중에 탑3 안에 꼽히죠.
잠깐, 그 타코를 먹었다고?
그 사람들은 먹어주길 바란다니까?
모르는 사람의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지금 장난해?
아, 그녀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운지. 그녀는 더 이상 여기 없음에도 그들이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할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녀가 죽은 뒤에 짐은 폭삭 늙어서 전보다 못해졌고 몸에서 빠져나간 공기를 다시 채우지 못했다.
병원에 앉아 있던 그날 밤에는 산다는 게 얼음 덮인 크레바스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는 가장자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쳐 내면의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추락하며 성난 목소리로 야크에게 속삭였다. "나도 하느님이랑 대화를 시도해봤어, 정말이야. 하지만 목사를 이렇게 아픈 환자로 만들다니 무슨 하느님이 그러냐? 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 말고는 한 게 없는데 이련 병을 네 엄마한테 내리다니 무슨 하느님이 그래?"
야크는 그때도 대답할 말이 없었고 지금도 대답할 말이 없다. 그는 잠잠히 대기실에 앉아서 목에 타고 흐르는 눈물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까지 아버지를 안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들은 떠오른 태양에 화가 났고 그들이 그녀 없이 살아가게 만든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도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안다. 누군들 모를까. 중독자들이 약물에 중독됐다면 그들의 가족은 희망에 중독됐다. 희망을 붙잡고 매달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항상 그녀이길 바라지만, 그녀의 남동생은 항상 이번에야말로 누나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일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겁에 질린다.
두 아이 모두 아직 같이 살던 시절, 모두들 아직 어지간히 행복했던 시절의 어느 날 저녁에 야크는 어머니에게 살릴 수도 없는 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지킬 때 그 옆에 앉아 있는걸 무슨 수로 견디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이렇게 말했다.
"아들, 코끼리를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는 똑같은 농담을 천 번들은 아이답게 대답했다. "조금씩 천천히요." 그녀는 부모답게 천 번째로 박장대소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떄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유치한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그거 알아요, 사라? 불안의 가장 인간적인 측면이 뭔가 하면, 우리가 혼돈을 혼돈으로 치료하려고 한다는 점이에요. 파국적인 상황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 거기서 출수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들 전보다 더 빠르게 계속 달리려는 성향을 훨씬 많이 보여요. 남들이 벽에 부딪히는 걸 보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 벽을 무사히 관통할 수 있길 기대해요. 그 벽에 가까워질수록 믿기지 않는 해결책이 기적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지만 그동안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충돌을 기다리고 있죠."
"그럼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이론적으로 배운 적 있어요?"
"많이요."
"그 중에 어떤 이론을 믿어요?"
"오랫동안 반복하다 보면 날아오르는 것과 떨어지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는 이론요."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가 은행 강도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말을 건넸다. 다섯 마디였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요."
"왜 거기를 갔어요? 왜 위험한 짓을 하세요? 왜 가족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무섭고 물안한 마음에 소리 지르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평소처럼 대답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지만 배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게 아니잖니."
토끼 탈은 계속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레나르트는 그 안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에 그가 한 말을 듣고, 사라는 그 말을 토끼가 했든 인간이 했든 그렇게 한심한 소리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경제 시스템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항상 상대방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하지만 너무 항상 그러면 안돼요. 너무 항상 상대방의 얘기에 귀 기울이면 나중에 서로를 용서할 수 없게 돼요."
"알코올중독자들은 따지 않은 술병을 집에 두지 않아요. 빈 술병만 굴러다니지."
노부인의 눈이 촉촉해졌지만 와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율리아는 생각을 하느라 하도 심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바람에 헤어스타일이 달라졌다. 율리아는 몸을 숙이고 에스텔의 팔에 한 손을 가만히 얹은 뒤 나지막이 속삭였다. "에스텔? 크누트가 지금 주차하고 있는거 아니죠?"
에스텔의 얇은 입술이 서글프게 말려 들어갔기 때문에 한참만에 그녀가 시인했을 떄에는 그 단어가 거의 거치지도 않았다. "네."
죄송합니다. 웃을 생각은 없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생각나서요. 뭔데요?
결국에는 이해가 안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고, 그래 놓고 평생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고 하셨거든요.
그녀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를 보며 먹던 아침을 뱉을 정도로 껄껄거리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런 장난은 나이를 먹을수록, 특히 그가 틀니를 한 뒤로 더 재밌어졌다.
"하지만 크누트, 그이는 주차를 아주 잘했어요. 아주 좁은 데서도 평행 주차를 할 수 있을만큼. 그래서 가끔 너무 괴로워지면, 정말 재밌는 걸 보고 '그이한테 이 얘기를 들려주면 벽지가 그이가 뱉은 아침으로 뒤덮이겠네' 하는 생각이 들면, 그이는 밖에서 주차를 하는 중이라고 상상해요. 그이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걸 하늘도 알고 땅도 알지만, 우리 둘이 어디를 갈 떄마다 비가 오면 그는 항상 문 바로 앞에 나를 내려줬어요. 그이가 주차하는 동안 나는.. 따듯한 데서 기다릴 수 있게."
다리는 사람들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존재하는 건데, 그러면서.
에스텔은 거듭 강조하고, 세상에서 폭소와 유쾌한 분위기만큼 불가항력으로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고 했던 영국 작가를 떠올렸다. 외로움은 굶주림과 같아서 뭘 먹기 시작한 다음에라야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있다고 했던 미국 작가도 떠올렸다.
"당신과 아이에게 부족한 사람이 될까 봐 겁나서 그런거에요. 그 친구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해줘요. 걸레받이를 자기가 직접 고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으니까. 한번 해보지도 않고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도 얘기해주고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가슴 뭉클한 순간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경찰이 당신 다리를 쏘았으면 좋겠소, 레나르트."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법 훈훈한 발언이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젊은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 사랑에 빠진 그 순간처럼 짜릿해야 하고, 그 어떤 것도 재미가 없으면 안 되고, 집중력이 유지되는 시간이 반짝이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새끼 고양이 수준이죠."
2021년 11월 16일 오전 9:53
일부 기자들은 '경찰의 무능'을 운운하며 힐난조로 질문을 퍼붓고, 다른 기자들은 실실 웃는 얼굴로 메모하며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기사와 블로그 포스트를 통해 야크를 학살할 준비를 한다. 치욕과 실패는 오롯이 야크의 몫이고, 그는 어느 누구도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게 혼자 그것을 짊어진다. 경찰서 안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얼굴을 손에 묻고 앉아있다.
"너는 훌룡한 경찰이다, 아들" 짐은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그보다 더 훌륭하지, 라고 덧붙이고 싶겠지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아빠는 가끔 더럽게 훌륭한 경찰은 아닐 때도 있죠." 야크는 구름에 대고 씩 웃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건 아빠께 배웠죠, 라고 덧붙이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집으로 갈 것이다. 텔레비전을 볼 것이다. 같이 맥주를 마실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매물이 아닌 아파트도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낭만적이죠."
에스텔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책을 맨 처음으로 줄 것이다. 어느 쪽 모서리를 접고 그녀가 아는 최고의 명문장 아래에다가 밑줄을 그어놓을 것이다.
"그대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온갖 일들이 그대에게 벌어질 테고
모두 멋진 일일 것이다!"
율리아는 에스텔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을 건넬 것이다. 스톡홀름 가이드북을.
"택시 같이 타고 갈래요?" 그는 그것이 바로 무질서의 정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이렇게 묻는다. 사라는 평생, 아니 아주 오랫동안 그 어떤 것도 누군가와 함께 한 적 없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중얼거린다. "같이 타고 가면 당신은 앞에 앉아요. 그리고 백미러에 쓰레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택시는 안 돼요. 그건 진화학적으로 막다른 지경이거든요."
그녀는 이제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12월은 인정사저없다. 하지만 이케아는 아직 문을 닫지 않았을 시각이다. 저기 어딘가에서 불빛이 보인다.
"당신이 얘기한 그 조리대 보러 갈까?" 그녀는 속삭인다.
그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무너진다. 로게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계속 생각을 바꾼다.
"다른걸 하면 어떨까 생각했어." 마침내 그가 웅얼거린다.
"무슨 소리야?"
"영화. 어때? 당신도 괜찮으면."
안나레나는 이미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 것이다.
아, 그래. 거기서 멀지 않은 아파트의 지하 창고, 은행 강도가 된 두 어린 딸의 어머니가 두려움에 떨며 혼자 잠을 청했던 그곳에는 인질극 다음 날에도 담요가 든 상자가 남아 있다. 전혀 다른 은행이 새해 다음날 털리지 않은 것은, 누군가가 담요 밑에 숨겨놓은 권총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 세상에 어떤 몰인정한 인간이 남의 권총을 훔친단 말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더는 이해하지 못해서 은행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문이 생긴 건가요?" 심리 상담사는 넘겨짚는다.
사라의 턱이 서글프게 좌우로 움직인다.
"아뇨.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그 셋 중 한 명이 나였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뭘 하실거에요?"
"모르겠어요."
심리 상담사는 마침내 중요한 말이 생각난다. 대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가끔 들어야 하는 말이다.
"잘 모르겠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도 좋죠."
편지가 수면을 떄렸을 즈음 사라는 이미 다리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거기에서 차 한 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레나르트가 안에 앉아 있다. 그녀가 문을 열자 그들의 시선이 만난다. 그는 그녀가 음악을 있는 대로 크게 들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싫증 나도록 반드시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흔히 인간의 성격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우리는 엄마를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요. 엄마한테 우리를 잃을 일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우리가 우주의 경계에 대해 어찌어찌 알아낸 게 있다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뿐이고,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목사였던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는 것.
하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오늘 하루가 끝나고 밤이 우리를 찾아오거든 심호흡을 한번 하기 바란ㄷ.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지 않은가.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2021년 9월 6일
따라서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기는 쉽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어려운 일인지 잊어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지는 못한단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주 좋은 인간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려움이 가중 된다고 말이다.
2021년 9월 8일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열대어에 대해서만큼이나 없기 때문에 엄청난 책임감으로 매일 아침 벌벌 떤다.
공과금도 내야 하고 어른도 되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는 법을 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지독히 높은 일이라서 겁에 질릴 때도 있다.
2021년 9월 9일
"아니, 질문에 대답을 해달라고요!" 경관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어린 시절 어느 시기에 삶에 환멸을 느낀 뒤 그 감정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성인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을 짓는다.
2021년 9월 10일
인생 선배가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네가 힘들어하고 있는거 안다. 그래서 나도 괴로워"뿐 일 때는 말이라는 것이 고역이 된다.
젊은 경관의 신발이 그가 앉았던 의자 아래 바닥에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남겼다.
고참 경관은 그걸 보며 수심에 잠긴다. 아들이 경찰이 되지 않길 바랐던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는 침착하게, 연민에 가까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모로서 제일 끔찍한 게 뭔지 아니? 최악의 순간을 기준으로 평가받는다는 거야.
백만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공원에서 아이가 그네에 머리를 맞았을 때 핸드폰을 들여다본 부모로 영원히 낙인이 찍히지.
며칠 동안 아이한테서 눈을 뗸 적이 없어도 문자 메시지 하나 확인한 순간 그동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없던 일이 돼.
어렸을 때 그네에 머리를 맞지 않았다고 해서 상담을 받는 사람은 없잔항.
부모는 항상 실수에 의해 규정이 되지."
2021년 10월 11일
직업 특성상 오랫동안 그 일을 하다 보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커리어를 제외한 인생의 다른 부분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6일
"내 말 듣고 기분 상했어요? 아우, 선생님 같은 사람들하고는 말을 섞는 그 순간부터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단 말이죠."
"이래저래 충돌하는 경우가 많으신 모양인데요. 발끈하기 전에 이 세 가지를 자문해보는 걸 추천할게요.
하나, 문제의 그 사람이 나를 해치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둘, 그 상황과 관련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은 없을까.
셋, 이렇게 부딪침으로써 얻는 소득이 있을까.
그녀가 모르는 모르는 단어는 없었지만 여러 단어를 모자 안에서 닥치는대로 꺼내 한데 조합한 것처럼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것 보세요,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어요. 어쩌다 보니 저절로 중역 회의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없다고요."
"비싼 음식점은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요. 비행기 1등석은 가운데 자리가 없고요. 특급 호텔에는 스위트룸 고객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 따로 있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곳에서는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이 남들과의 거리예요."
"내 경험상 세상에는 개 같은 인간들이 많아요. 감정적으로 냉랭하고 생각 없는 인간들. 하지만 그래도 그 인간들은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지 않죠."
"맞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세상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한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죠. 적어도 세상을 지금보다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지는 않다고, 자기가 옳은편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그러니까...뭐라고 하면 좋을까요...우리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더라도 그 행동이 좋은일에 쓰였다고 믿고 싶은 거죠. 기본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니 자신이 도덕적 잣대를 어겼을 때를 대비해 변명을 마련해야 하는거에요. 범죄학에서는 이걸 중화 기술이라고 부를 거예요.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념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믿음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아무튼 악행을 정당화할 방법이 필요하죠. 왜냐하면 저는 솔직히 자기가...나쁜 사람이라는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거든요"
핸드백에 담긴 편지는 여전히 미개봉 상태였고 사라는 심리 상담사의 말이 맞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감히 그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사라는 자신의 진면모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멍청해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속으로는 그렇다.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물론 문제가 있다면 바보들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바보라서 친절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나디아에게는 그것이 평생 씨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과업이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과 함께 지낸 세월이 너무 길다 보면 더는 옥신각신 하지 않는것과 신경쓰지 않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2021년 11월 8일 오후 3:41
바보들은 인질로 붙잡아놓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2021년 11월 12일 오전 1:12
인생에서 딱 하나만큼은, 딱 한명만큼은 당연하리만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들은 예전부터 대화가 없었다.
안나레나는 아이가 생기면 나아지길 바랐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기분 상태에 온 가족이 숨죽이는 날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리다 보면 어른들은 한참 동안 자기 기분을 아무한테도 토로하지 못한 채 지낼 수 있고,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어떨 때는 아예 토로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2021년 11월 12일 오전 9:15
"용서해주세요." 은행 강도가 그들 위로 내려 앉은 정적을 불쑥 깨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못 들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두 들었다. 얇은 벽과 그 빌어먹을 오픈 플랜식 배치 덕분에 그가 한 말이 벽장 안, 현관홀, 화장실 문 너머에까지 들렸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지 않았지만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두 알았다.
"죄송합니다." 은행 강도가 아까보다 더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작 됐다. 은행 강도가 아파트에서 탈출하게 된 사연이. 은행강도는 그 말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를 용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톡홀롬'은 중후군이 될 수도 있다.
"라임 드실래요?"
논리와 이성적인 사고를 관장하는 뇌의 일부분에서 천 개의 조그만 신경종말이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상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온 직후에 방영된 TV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로게르는 달걀에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안나레나가 깜빡 잠이 들면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거나 그녀의 머리를 어깨로 계속 받치고 있고 싶어서 가끔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버틸 때도 있었다.
율스는 계속 제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지만 저는 심지어... 달걀을 사도 되는지, 그것조차 결정을 못 내리는걸요. 저는 못 할 거에요.
그는 로가 뭣 떄문에 겁이 나는지 알고도 남았다.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 거기서 문제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해야 하는 것. 요즘 들어서 로게르는 이걸 시인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미치도록 화가 나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령 세상에 기여하는 능력이나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능력 같은 것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 그는 이제 안나레나에게 간파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화장실에 토끼를 숨겨놓고 존경하는 척 연기하는 쇼로 전락했고 아파트 하나를 더하고 뺀들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로게르는 심이 부러질때까지 이케아 연필로 손톱을 찌르다 짧게 헛기침을 하고 로에게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가장 근사한 선물을 했다.
"아내를 위해서 이 집을 사요.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조금 손 볼 데가 있을지는 몰라도 습기가 차서 얼룩진 곳도 없고 곰팡이도 없어요. 부엌과 화장실은 상태가 아주 훌륭하고 주택조합 재정도 탄탄해요. 걸레받이가 몇 군데 헐거워지긴 했지만 금세 고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저는 걸레받이를 고칠 줄 몰라요." 로가 속삭였다.
로게르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고 아주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네 마디를 뱉었다.
"잘할 수 있을 거에요."
2021년 11월 13일
세심하고 원칙적이다. 흔히들 하는 말이죠.
“세심하고 원칙적이다. 흔히들 하는 말이죠.”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쟁을 시작한 모든 노인네를 묘사하기에 딱 알맞은 단어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그럴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당신한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좀 더 수월할 줄 알았어요…… 여자랑 같이 살면.”
율리아는 폭소를 터뜨렸다.
“어떤 성별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안나레나. 어떤 바보를 사랑하게 되는 거지.”
안나레나도 평소보다 훨씬 크게 폭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에 그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안나레나는 나이가 율리아보다 두 배는 많았지만 그 순간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손자가 생기면 그분이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나요?”
안나레나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세 살짜리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서 집까지 가본 적 있어요?”
“아뇨.”
“그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될 수 없어요.”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외풍에 살짝 떨며 그 자리에 앉아 있는다. 두 사람 모두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2021년 11월 15일 오후 4:50
로게르는 쪽지를 매달 만한 묵직한 물건이 없는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밀도가 딱 알맞아 보이는 둥그런 물건을 발견했다. 발코니에서 누군가가 다시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야크가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라임에 이마를 맞게 된 사연은 이랬다.
그 정도 거리에서 라임에 맞으면 왕따시만 한 혹이 생긴다.
"우린 처음부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친구가 아파트를 구경 갈떄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는거 아세요? 그게 용납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사실 개의치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냉장고를 열어주길 바라요. 그게 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시도하는 이른바 '홈스타일'의 일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한번은 냉장고 안에 타코가 있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먹은 타코 중에 탑3 안에 꼽히죠.
잠깐, 그 타코를 먹었다고?
그 사람들은 먹어주길 바란다니까?
모르는 사람의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지금 장난해?
아, 그녀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운지. 그녀는 더 이상 여기 없음에도 그들이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할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녀가 죽은 뒤에 짐은 폭삭 늙어서 전보다 못해졌고 몸에서 빠져나간 공기를 다시 채우지 못했다.
병원에 앉아 있던 그날 밤에는 산다는 게 얼음 덮인 크레바스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는 가장자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쳐 내면의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추락하며 성난 목소리로 야크에게 속삭였다. "나도 하느님이랑 대화를 시도해봤어, 정말이야. 하지만 목사를 이렇게 아픈 환자로 만들다니 무슨 하느님이 그러냐? 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 말고는 한 게 없는데 이련 병을 네 엄마한테 내리다니 무슨 하느님이 그래?"
야크는 그때도 대답할 말이 없었고 지금도 대답할 말이 없다. 그는 잠잠히 대기실에 앉아서 목에 타고 흐르는 눈물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까지 아버지를 안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들은 떠오른 태양에 화가 났고 그들이 그녀 없이 살아가게 만든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도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안다. 누군들 모를까. 중독자들이 약물에 중독됐다면 그들의 가족은 희망에 중독됐다. 희망을 붙잡고 매달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항상 그녀이길 바라지만, 그녀의 남동생은 항상 이번에야말로 누나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일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겁에 질린다.
두 아이 모두 아직 같이 살던 시절, 모두들 아직 어지간히 행복했던 시절의 어느 날 저녁에 야크는 어머니에게 살릴 수도 없는 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지킬 때 그 옆에 앉아 있는걸 무슨 수로 견디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이렇게 말했다.
"아들, 코끼리를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는 똑같은 농담을 천 번들은 아이답게 대답했다. "조금씩 천천히요." 그녀는 부모답게 천 번째로 박장대소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떄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유치한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그거 알아요, 사라? 불안의 가장 인간적인 측면이 뭔가 하면, 우리가 혼돈을 혼돈으로 치료하려고 한다는 점이에요. 파국적인 상황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 거기서 출수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들 전보다 더 빠르게 계속 달리려는 성향을 훨씬 많이 보여요. 남들이 벽에 부딪히는 걸 보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 벽을 무사히 관통할 수 있길 기대해요. 그 벽에 가까워질수록 믿기지 않는 해결책이 기적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지만 그동안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충돌을 기다리고 있죠."
"그럼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이론적으로 배운 적 있어요?"
"많이요."
"그 중에 어떤 이론을 믿어요?"
"오랫동안 반복하다 보면 날아오르는 것과 떨어지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는 이론요."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가 은행 강도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말을 건넸다. 다섯 마디였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요."
"왜 거기를 갔어요? 왜 위험한 짓을 하세요? 왜 가족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무섭고 물안한 마음에 소리 지르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평소처럼 대답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지만 배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게 아니잖니."
토끼 탈은 계속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레나르트는 그 안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에 그가 한 말을 듣고, 사라는 그 말을 토끼가 했든 인간이 했든 그렇게 한심한 소리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경제 시스템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항상 상대방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하지만 너무 항상 그러면 안돼요. 너무 항상 상대방의 얘기에 귀 기울이면 나중에 서로를 용서할 수 없게 돼요."
"알코올중독자들은 따지 않은 술병을 집에 두지 않아요. 빈 술병만 굴러다니지."
노부인의 눈이 촉촉해졌지만 와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율리아는 생각을 하느라 하도 심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바람에 헤어스타일이 달라졌다. 율리아는 몸을 숙이고 에스텔의 팔에 한 손을 가만히 얹은 뒤 나지막이 속삭였다. "에스텔? 크누트가 지금 주차하고 있는거 아니죠?"
에스텔의 얇은 입술이 서글프게 말려 들어갔기 때문에 한참만에 그녀가 시인했을 떄에는 그 단어가 거의 거치지도 않았다. "네."
죄송합니다. 웃을 생각은 없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생각나서요. 뭔데요?
결국에는 이해가 안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고, 그래 놓고 평생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고 하셨거든요.
그녀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를 보며 먹던 아침을 뱉을 정도로 껄껄거리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런 장난은 나이를 먹을수록, 특히 그가 틀니를 한 뒤로 더 재밌어졌다.
"하지만 크누트, 그이는 주차를 아주 잘했어요. 아주 좁은 데서도 평행 주차를 할 수 있을만큼. 그래서 가끔 너무 괴로워지면, 정말 재밌는 걸 보고 '그이한테 이 얘기를 들려주면 벽지가 그이가 뱉은 아침으로 뒤덮이겠네' 하는 생각이 들면, 그이는 밖에서 주차를 하는 중이라고 상상해요. 그이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걸 하늘도 알고 땅도 알지만, 우리 둘이 어디를 갈 떄마다 비가 오면 그는 항상 문 바로 앞에 나를 내려줬어요. 그이가 주차하는 동안 나는.. 따듯한 데서 기다릴 수 있게."
다리는 사람들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존재하는 건데, 그러면서.
에스텔은 거듭 강조하고, 세상에서 폭소와 유쾌한 분위기만큼 불가항력으로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고 했던 영국 작가를 떠올렸다. 외로움은 굶주림과 같아서 뭘 먹기 시작한 다음에라야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있다고 했던 미국 작가도 떠올렸다.
"당신과 아이에게 부족한 사람이 될까 봐 겁나서 그런거에요. 그 친구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해줘요. 걸레받이를 자기가 직접 고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으니까. 한번 해보지도 않고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도 얘기해주고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가슴 뭉클한 순간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경찰이 당신 다리를 쏘았으면 좋겠소, 레나르트."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법 훈훈한 발언이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젊은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 사랑에 빠진 그 순간처럼 짜릿해야 하고, 그 어떤 것도 재미가 없으면 안 되고, 집중력이 유지되는 시간이 반짝이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새끼 고양이 수준이죠."
2021년 11월 16일 오전 9:53
일부 기자들은 '경찰의 무능'을 운운하며 힐난조로 질문을 퍼붓고, 다른 기잗ㄹ은 실실 웃는 얼굴로 메모하며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기사와 블로그 포스트를 통해 야크를 학살할 준비를 한다. 치욕과 실패는 오롯이 야크의 몫이고, 그는 어느 누구도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게 혼자 그것을 짊어진다. 경찰서 안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얼굴을 손에 묻고 앉아있다.
"너는 훌룡한 경찰이다, 아들" 짐은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그보다 더 훌륭하지, 라고 덧붙이고 싶겠지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아빠는 가끔 더럽게 훌륭한 경찰은 아닐 때도 있죠." 야크는 구름에 대고 씩 웃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건 아빠께 배웠죠, 라고 덧붙이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집으로 갈 것이다. 텔레비전을 볼 것이다. 같이 맥주를 마실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매물이 아닌 아파트도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낭만적이죠."
에스텔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책을 맨 처음으로 줄 것이다. 어느 쪽 모서리를 접고 그녀가 아는 최고의 명문장 아래에다가 밑줄을 그어놓을 것이다.
"그대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온갖 일들이 그대에게 벌어질 테고
모두 멋진 일일 것이다!"
율리아는 에스텔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을 건넬 것이다. 스톡홀름 가이드북을.
"택시 같이 타고 갈래요?" 그는 그것이 바로 무질서의 정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이렇게 묻는다. 사라는 평생, 아니 아주 오랫동안 그 어떤 것도 누군가와 함께 한 적 없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중얼거린다. "같이 타고 가면 당신은 앞에 앉아요. 그리고 백미러에 쓰레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택시는 안 돼요. 그건 진화학적으로 막다른 지경이거든요."
그녀는 이제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12월은 인정사저없다. 하지만 이케아는 아직 문을 닫지 않았을 시각이다. 저기 어딘가에서 불빛이 보인다.
"당신이 얘기한 그 조리대 보러 갈까?" 그녀는 속삭인다.
그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무너진다. 로게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계속 생각을 바꾼다.
"다른걸 하면 어떨까 생각했어." 마침내 그가 웅얼거린다.
"무슨 소리야?"
"영화. 어때? 당신도 괜찮으면."
안나레나는 이미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 것이다.
아, 그래. 거기서 멀지 않은 아파트의 지하 창고, 은행 강도가 된 두 어린 딸의 어머니가 두려움에 떨며 혼자 잠을 청했던 그곳에는 인질극 다음 날에도 담요가 든 상자가 남아 있다. 전혀 다른 은행이 새해 다음날 털리지 않은 것은, 누군가가 담요 밑에 숨겨놓은 권총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 세상에 어떤 몰인정한 인간이 남의 권총을 훔친단 말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더는 이해하지 못해서 은행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문이 생긴 건가요?" 심리 상담사는 넘겨짚는다.
사라의 턱이 서글프게 좌우로 움직인다.
"아뇨.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그 셋 중 한 명이 나였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뭘 하실거에요?"
"모르겠어요."
심리 상담사는 마침내 중요한 말이 생각난다. 대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가끔 들어야 하는 말이다.
"잘 모르겠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도 좋죠."
편지가 수면을 떄렸을 즈음 사라는 이미 다리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거기에서 차 한 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레나르트가 안에 앉아 있다. 그녀가 문을 열자 그들의 시선이 만난다. 그는 그녀가 음악을 있는 대로 크게 들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싫증 나도록 반드시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흔히 인간의 성격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우리는 엄마를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요. 엄마한테 우리를 잃을 일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우리가 우주의 경계에 대해 어찌어찌 알아낸 게 있다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뿐이고,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목사였던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는 것.
하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오늘 하루가 끝나고 밤이 우리를 찾아오거든 심호흡을 한번 하기 바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지 않은가.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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